하동정씨 정승공파 상계소목 해설


1세조 휘 응(膺)

고려 고종(高宗 1213~1259)때 문과(文科)에 올라 관직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도첨의 좌정승(都僉義左政丞) 검교 태자첨사에 이르시다.
배위는 군부인(郡夫人) 하동배씨이시다.
당시의 정국은 원(元-몽고)의 침공으로 비상 체제하에 있던 시대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수도를 송도(松都-개성)에서 강도(江都-강화도)로 옮겨 고려 특유의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던 때이다. 따라서 문과에도 강도에서 급제하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초강대국인 몽고에 37년간을 항전한 사례는 없다.
당시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과 친교하셨다고 안동김씨 세보에 전한다.
묘소는 개성부 동부면 동현리(開成府 東部面 東峴理)라는 기록이 있으나 실전된지 오래이다.
계해(癸亥-서기 1993년)에 대구시 동구 백안동 산1번지의 도선산에 단소를 모시고 제사를 받든다.



2세조 휘 성

역시 문과에 올라 관직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附使)에 이르시다.
추밀원은 왕명(王命)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사기밀을 맡아보던 기관이었는데 1275년(충렬왕1)에 밀직원으로 개편되었다.
품계는 종2품직이다. 배위는 현부인(懸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이시다. 묘소는 정승공과 더불어 개성 부근이었으나 역시 실전이다.
일설에는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가셨는데 송의 조정에서 은자광록대부(銀紫光綠大夫)의 관직을 받으셨다 전한다.



3세조 휘 계

관직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로 평장사를 지내시고 훈봉(勳封)이 하천군(河川君)이시다. 세보에는 평장사로 되어있으나
다른 문헌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나온다.
모두 종2품으로 같은 품계에 속하나 활동 연대가 충열왕(忠烈王)이나 충(忠宣王)의 시대라 추정한다면 당시는 원의 내정간섭이 우심하여
관직도 원에 준하였으므로 이부상서가 맞고 평장사 제도는 그 후 공민왕 때에야 부활되었다.
배위 군부인 문화류씨는 문산군 류방비(文化柳氏 柳方庇)의 4녀이시다. 문화류씨 세보에 하천군이라고만 나오고 관직은 나타나 있지 않다.



4세조 휘 승경(承慶)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첨의 찬성사(門下僉義 贊成事-종2품)며 배위는 군부인 중화김씨이시다.
어떤 문헌에 의하면 정송공이하 4세가 내리 문과에 올랐다는 기록이 보이는가 하면 어떤 문헌에는 경사(慶事-문과급제)를 이었다하여
휘를 승경이라 했다는 사실도 나온다. 활동년대는 충숙왕(忠肅王) 시대로 추정된다.



5세조 휘 태보

우리 세보에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로 나오고 있으나 추밀원은 1275년에 밀직사(密直司)로 개편되었으므로 밀직부사로 된 세보가 맞다.
전후의 연관으로 보아 이 할아버지부터 대구부 해안현(大邱府解顔縣三治東)에 정착하신 것으로 사료된다.
미확인 문헌에는 우복야 밀직부사 재직시에 광양현감으로 강직(降職) 되셨다는 기록이 있다.
강직이 되시니 치사(致仕-사직)하시고 대구에 정착하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6세조 휘 희(熙)

호는 묵은(默隱) 초휘는 희량(熙良)이시며 일명 옹(雍)이시다. 홍무(洪武) 9년(1376 우왕 3년)에 진사시에 장원하시고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시었다.
원래 대구의 해안현에 사시다가 당시의 대학자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선생에 사사(師事)하기 위하여 송도의 나복산 아래 포은 선생의 이웃집으로
이거하시어 수학하시었다.
공양왕 4년(서기1392)에 기울어 가는 고려의 사직을 부지하고자 간관 김진양(金震陽)등 14인이 연서로 나라를 뒤엎으려는 정도전(鄭道傳)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등을 처벌하기를 간청하는 소문을 올렸으나 왕은 이미 허수아비가 되고 조정안은 이미 이성계 일당이 좌우하는 터라 받아들여지지 않았을뿐 아니라
포은 선생이 선죽교에서 순국하는 그날로 유배되어 우리 세보(世譜)와 일부 문헌에는 해도유배(海島流配)로 기록되고 있으나 일부 문헌과 조선왕조실록에는
"고향 안치(故鄕安置)"라 기록되고 있다. 태종 1년(서기1400년)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상소에 의하여 포은선생께 시호와 증직을 내리고 유배된 고려 충신을
모두 귀양에서 풀어주었다. 충신들의 충성은 고려의 국가를 위한 일이고 그 충절이 가상하며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충신은 크게 포상되어야 한다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묵은공에게도 귀양을 풀어준다는 교서가 내리고 막바로 큰 아드님이신 휘 포(抱)에게 백의(白衣)로 상원군사(祥原郡事)를 임명하였고 얼마 뒤 공에게도
여러 번 벼슬이 내렸으나 충신의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부름에 쫒지 않고 문밖을 나서는 일 없이 불사이군(不仕二君)의 충절을 다하였다.
말년에 한양 밖 아현리(阿峴里) 우안(佑岸)으로 이거하시어 하세하시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두문동 72현 중 9정선(貞臣)으로 우러러 개성의 두문동 서원(杜門洞書院)의 항절(抗節) 1실과 경현사(景賢祠)
화담사에 배향되시었다.
공의 기록은 화해사전(華海師全) 부조언 언지록 승국명류표방록등에서 볼수 있으며 묘소는 양주 서산 오리 첨산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장자 휘 포(군사공)의
묘소와 함께 실전되어 대구 백안동에 백여년 전에 단소를 모시고 있는데 단비의 내용에 공의 생졸년(生卒年)과 배위(전취) 일직부인 대구서씨와 후배 일직부인
남양홍씨의 생졸년이 실전이라 기록되고 있으나 공의 생년만은 여러 문헌에 충정왕 2년(서기 1348)이라 전하고 있다.



7세조와 3派

1.군사공파(郡事工派)
一세조부터 六세조까지는 독신(獨身)으로만 이어져 오다가 七세조에 이르러 비로소 三파로 분파된다.
장자 휘 포께서 전술한 바와 같이 상원군사를 지내시었으므로 그 후손을 군사공파라 칭한다.
군사공의 증손인 한림공 휘 림(霖)께서 성종연간에 언사오지(言事悟旨)로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었는데 유배가 풀린 후로도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손이
선천 인근의 박천(博川) 정주(定州) 철산(鐵山) 용천(龍川) 의주(義州) 삭주(朔州)등의 관서지방의 평야가 비교적 넓은 7개군에 2만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문과 급제자와 무과 급제자가 200여명으로 서북지방 제1의 명문임을 자랑하고 있다.
또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공적을 남긴 양무공(孃武公 휘 壽 1572(선조5)-1645(인조23)을 비롯하여 참판공(參判公 휘 기남(寄男)형제분의 혁혁한 무공은
찬연하게 민족사에 빛난다.

2.문경공파(文景工派)
묵은공의 二子. 문경공의 자(字)는 열지 휘는 초(招)이시고 생년은 미상이며 그 후손을 문경공파라 한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시고 태종(太宗) 5년의 식년시(式年試)에 문과에 오르시고2년 후 다시 중시(重試)에 급제 하시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국조방목(國朝傍目) 등의 문헌에 모두 천자총민(天資聰敏)이 과인(過人)이라 기록될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셨고, 업적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록할 수 없어 연보(年譜)로 줄인다.
생년(生年)이 실전되고 있으며 출생은 송도의 구제(舊第)출생으로 추정된다.

조세(早歲-20세 이내)에 생진과(生進科-사마시) 급제
태종 5년 을유(乙酉 1405) 문과에 급제 을과(乙科 1인자)
태종 7년 정해(丁亥 1407) 문과 중시(重試) 급제(10년1시)
세종 1년 기해(己亥 1419) 공예조 참의 (工,禮曹參義)
세종 2년 경자(庚子 1420) 좌대언(左代言-좌승지)
세종 4년 임인(任寅 1422) 예조참판(禮曹參判)
세종 5년 계묘(癸卯 1432) 함길도 관찰사
세종 7년 무신(茂申 1428) 이형조 참판 좌군총제(左軍憁制), 박연(朴堧)과 아악 정리
세종 11년 기유(己酉1429) 봉교(奉敎)로 악율정리
세종 13년 경술(庚戌 1430 집현전(集賢殿) 대제학 겸배,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속오전(續五典) 개수
세종 14년 신해(辛亥 1431)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편찬
세종 15년 임자(壬子 1432) 봉교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편찬, 대소간이대 제공 삼강행실(三綱行實)편찬
세종 16년 계축(癸丑 1433) 혼천의 제공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편찬
세종 17년 갑인(甲寅 1434) 6월 하세

시호는 문경(文景) 시명(諡銘)은 학근호문왈문(學勤好文曰文)이요 유의이제왈경(由義以制曰景)-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은 문(文)이요
여러제도를 정함에 있어 의로움은 힘씀은 경(景)이다.

3. 찬성공파(贊成公派)
묵은공의 三子 찬성공의 휘는 제(提)이시고 우리문중의 직계 조상이시다.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오르시고 음사(陰仕)로 승의랑(承義郞)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시다.
후에 아드님이신 八세 문절공의 훈업으로 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신 위에 하원군(河原君)의 봉군(封君)을 받으셨다.
그 후손을 찬성공파라 한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산김씨로 충청감사 약채(若采)공의 따님이시며 묘소는 대구시 동구 백안동 산1번지 간죄에 합장이다.



8세조 휘 수충(守忠) 자는 경부이시고 시호는 문절이시다.

사적이 많아 년보(年譜)로 약술한다.
태종 1년 신사(1401) 8월 11일 송도부제에서 출생(묵은공께서 귀양이 풀리던 해)
태종 5년 을유(1405) 5세 어머니 정경부인께서 딸을 낳으신 다음 달에 하세하시니 찬성공을 따라 대구부 해안현(大邱府解顔縣)의 옛집에서 성장하시고 힘써 공부하시다.
세종 4년 임인(1422) 22세 찬성공께서 역병으로 병세가 위중하시니 하늘에 자신으로 대신하기를 기원하고 뒤(인분)를 맛보시며 정성들여 시탕하였으나 하세하시므로
예법을 다하여 장사지냄.
세종 15년 계축(1433) 33세 사용 여흥민씨 보흔(普炘)공의 따님과 혼인
세종 20년 무오(1438) 38세 성묘차 귀향길에 읊은 시 한수가 현재까지 전해 온다.
세종 27년 을축(1445) 45세 세종대왕의 八남 영응대군의 사부에 임명됨
세종 31년 기사(1449) 49세 경창부승을 겸직
세종 32년 경오(1450) 50세 문과식년시(式年試) 급제 전농주부(典農主簿-종6품)
문종1년 신미(1451) 51세 승문원 부교리
단종 2년 갑술(1454) 54세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정4품)
세조 1년 을해(1455) 55세 충좌익 공신 3등 공없다 사양
세조 2년 병자(1456) 56세 성균관 사성(司成-종3품)
세조 3년 정축(1457) 57세 통정대부 첨지 중추원사
세조 9년 계미(1463) 63세 성균관 대사성
세조 11년 을유(1465) 65세 숭정대부 중추원 판사(종1품)
예종 1년 기축(1469) 69세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봉조하(奉朝賀) 9월6일 하세

시명(諡銘) 학근호문왈문(學勤好文曰文) 호렴자극왈절(好廉自克曰節)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을 학이요, 청렴함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억누름은 절이다.)
문절공은 박통경사(博通經史-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함)하시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돈 모으기에 힘쓰지 않았으며 평생에 권문(權門)을
찾는 일이 없었다고 왕조실록(예종1년 9월 6일조)에 기록되어 있다.
배위 정경부인 여흥민씨는 보흔공의 따님이시며 조부는 전서(典書-고려시대의 판서) 중훤(仲萱)이시고 증조는 여평군문하시중(驪平君 門下侍中)이신
함계(咸啓)공이며 문절공의 묘소는 대구 동구 백안동 묘곡 간좌요 정경부인의 묘소는 경기도 에 모셔진데는 사연이 있다.
슬하에 아들만 9형제를 두셨는데 다섯 아들은 대부(大夫 종 4품이상) 참상(參上-6품이상)이 2명 참하(參下-7품이하)가 2명이시다(문절공 묘비 및 기타 문헌에 나옴)
아들의 휘는 화(和) 직(稷) 온(縕) 목(穆) 적(積) 육(陸) 주(綢 또는 조) 세(稅) 균(묶을 균)이시다. 광주 화담사 영동 청절사, 화순 예산사에 배향되고
황해도 금천 청주에 문절영당이 있으며 향사당으로 대구 백안동에 청백서원이였다.



9세조와 8派

1.보성공파(寶城公派)
문절공의 장자로 휘는 화(和)이시며 1434(세종 16)-1505(연산 11) 조세에 성균생원시(成均生員試)에 급제하시어 원주판관(原州判官 종 5품)을 거쳐
성종 3년(1472) 3월 10일에 편전대기(便殿待期) 보성군수에 제수(際授)(왕조실록 16권 642면 참조) 되시어 만 5년간 수령칠사를 실천하시고 선정을 베푸시어
보성유림과 군민에 의해 그공을 기리기 위하여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는데 병화로 비가 없어진 것을 1997년에 보성 향교에 재건하여 2000년 6월에 제막식을 가졌다.

守令七事란
지방 수령의 준수사항- 성종 3년에 보성공을 상께서 보성군수를 특명제수할때 하문하시기를 네가 보성고을에 내려가면 어떻게 다스리겠느냐 하문 하시니
"수령칠사(守令七事)하겠나이다"라고 답변한 내용
1.농상성(農桑盛)-농사와 잠업(누에치기)를 성하게 하고)
2.호구증(戶口增-백성의 호구를 늘리게 하며)
3.학교흥(學敎興-학교(향교)를 크게 지원하여 공부에 힘쓰게 하며)
4.부역균(賦役均-부역(군민의 노역)을 골고루 배당하며)
5.군정수(軍政修-군정에 관한 일은 바르게 고쳐 수행하며)
6.사송간(詞訟簡-백성의 송사은 신속 명료하게 처결하고
7.간활식(奸猾息-간사하고 요망스런 일은 단호하게 막는다.)

보성군수에서 과만되어 광주로 오셔 군분(현 화정동)을 개기(開基)하셨으며 보성보를 막으시고 보성교를 가교하셨는데(광주시사) 현재의 농성동명 또한 보성공을
기리기 위하여 성자에 붙어잇다. (광주시 마을 유래지) 만년에는 황해도 금천으로 이거하시고 고종하셨으며
묘소는 경기도 봉동면 발송리 송곡촌 후 개산능 (현재 휴전선 남방분계선내 철책지구)에 있어 출입이 통제되어 제사를 받들지 못하므로
화순군 남면에 있는 추선문중의 세장산의 맨위에 제배단을 설단하여 세일제를 모신다.
배위는 숙부인 영천이씨와 후배 숙부인 의성 김씨가 같은 묘소에 모셔져있다.
아들은 휘 광원(光元) 광형(光亨) 광리(光利) 광정(光貞) 광상(光常)이시다.

2.판관공파(判官公派)
휘는 직(稷)으로 문절공의 二자이시며 음사(陰仕)로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종5품)에 서용되시었다. 풍덕군수, 부사에까지 누진하였다.
후손이 황해도 금천과 고흥 도양읍에 거주한다.

3.직장공파(直長公派)
문절공의 三자로 휘는 온(穩)이시고 음사로 직장(直長-종7품)을 역임하셨는데 어느 부서의 직장인지는 실전이다. 후손이 순천, 낙안에 거주하는데 손세가 적다.

4.유수공파(留守公派)
문절공의 四자로 휘는 목(穆)이시고 진사시에 급제후 보은군수, 광주유수(廣州溜守-정2품)에 이르시다. 후손이 영동, 금산,광주, 청원에 거주한다.

5.장령공파(掌令公派)
문절공의 五子로 휘는 적(積) 자는 덕구(德久)이시고 성종 을미(1475)의 친시(親試)에 등과하여 첨정(僉正) 자정(資正)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정4품)
이천부사(利川府使 종3품)을 역임하셨다. 후사가 없으시어 보성공의 二子 휘 광형(光亨)께서 출계(出系)하셨으며 후손이 김포,연천,강화에 거주한다.

6.사직공파(司直公派)
문절공의 六子이시며 휘는 륙(陸)으로 음사로 오위 사직(五衛 司直-정5품)을 역임하셨다. 후손이 남평,보성에 거주하며 손세가 적다.

7.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문절공의 七子이시며 휘는 조(稠)요 자는 자개(子槪)이시다. 음사로 선무랑(宣務郞-종6품)에 서용되시고 부서는 주부(主簿를 거쳐 서반(西班-무관)의
어모장군(御姆將軍-정3품)에 이르셨다. 후손이 천원군 목천면 일대에 거주한다.

8.생원공파(生員公派)
문절공의 八子로 보성공을 따라 보성에서 수학하시다 생원시에 급제하시어 음사로 오위 호군(護軍)에 서용되셨음이 요즈음에 판명되었다.
왕조실록에 판관공과 같은 날에 서용되었음이 나온다. 후손이 보성군내와 광주의 오치,양지등에 거주한다.
* 휘 균 문절공의 九子로 휘는 균이다. 일찍 하세한 것으로 사료된다.